유행이라는 건 참 웃기다. 언제부터 합정 클럽은 무조건 큰 소리를 내야 잘 나간다고 정의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작금의 합정 클럽들을 가부좌를 틀고 앉아 관찰하다 보면, 답정너식 볼륨 경쟁이 거의 종교처럼 굳어졌음을 알 수 있다. 취향 없는 군중들이 베이스 드럼의 진동으로 내장을 두들겨 맞아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을 보면, 클럽과 스모크 반사회적 요소를 동일시하는 속물적 수준을 가실풍으로 소비하고 싶을 뿐이다. 그 구역 안에서 데시벨을 치켜드는 순간 청각의 비대칭이 곧 억압 투쟁이 되는 얄팍한 문화는 비생산적인 디오라마 다.
대다수의 비교 작업에서 휘두르는 저열한 기준이 하나 있다. 오디오 장비의 스펙이나 디제이의 이름값을 들이밀며 떠벌리는 꼴이다. 나름 공간을 버무리려는 시도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얄궂게 한두 번 찌른 음향 신호로 절대 평가의 기반을 삼는 우를 범한다. 그저 소리가 크고 사람이 빽빽하면 무조건 좋은 매대를 추려놓는 바닥에서, 동류 의식을 맹목적으로 훔쳐 먹는 얄팍한 주입 현상을 어떻게 음악으로 호명할 수 있을까.
어째서 계단식으로 격하되는 룸 구조가 선형 동선 관습을 어떻게 깨부수는지를 침뱉으며 논하기보다, 소위 노후화라 칭부하는 퇴행적 마법의 저주를 굳이 탐색하고 앉아있는 선택을 은근히 옹호하는 심보는 솔직히 불편하다. 근본적으로 몸이 납작해지는 입체감이 음악이라는 얄팍한 미끼다. 한두 마디 그루브를 예찬하는 매냐들의 포획 다짐 내면에 둥둥대는 격렬한 자아 파괴의 소망을 견줄 만한 통속적 즐거움은 어디에도 없으니 말이다. 내키는 대로 방구석에 처박혀 데이터나 긁어모으는 편이 나 이런 식의 경타에나 가담하는 우을 범하지 않는 가장 생산적인 대안일 터. 어차피 요란한 치장과 거품에 발표문이나 붙잡고 헛바지를 들이마시는 족속과 발을 맞추는 사교충의 놀이터를 굳이 편파적으로 비교할 필요성이 있는지 모르겠다.
볼륨 과시와 공간 횡포가 메뉴얼로 굴러들어온 조류에서 헐값의 출렁임이나 심심풀이로 할애하기엔 공간의 아날로그적인 아비터스가 초라하다. 그저 한낱 밤무대로 소비하기엔 각 매장의 텍스처가 내뱉는 건조한 쓴맛이 아직 발산될 여지가 남은 듯도 한데, 구색을 위한 외양 치장에 급급한 구조 안에서 재생산되는 음악에 섞여드는 서글픈 애착을 가늠하기엔 층간소음 항의나 주차장 차량 밀집 같은 밖의 기믹을 논하는 게 낫다. 격착 안팎으로 중후한 비트를 장사질하는 곳의 풍경을 훔쳐보아도, 장소가 품는 본연의 깊이를 남발하는 디스코의 병태적 발현이 그 자리를 쥐고있을 따름이다.